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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단 (연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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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단은 전한 무제의 아들로, 연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실패했고, 소제가 즉위한 후 두 차례에 걸쳐 찬탈을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유택 등과 모의하여 무기를 갖추고 반란을 꾀했으나 발각되어 처벌을 면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상관걸 등과 결탁하여 곽광을 제거하고 황제가 되려 했지만, 모의가 발각되어 자결했다. 유단은 '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연나라는 폐지되었다.

2. 사적

유단은 무제의 아들로, 원수 6년(기원전 117년)에 형제들과 함께 왕으로 봉해져 연나라를 다스렸다.[2][3] 여태자 유거제회왕 유굉이 죽은 후, 자신이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무제의 분노를 사 봉토가 삭감되고, 소제가 황태자가 되었다.[3]

무제 사후 소제가 즉위하자, 유단은 변고를 의심하여 장안에 사신을 보냈으나, 집금오 곽광에게 황제 즉위를 확인받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유단은 중대부를 보내 무제의 사당을 세우자고 상소했다.[3]

대장군 곽광은 유단을 회유하려 3000만위안을 내리고 봉읍을 늘려주었으나, 유단은 황제가 되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 중산애왕의 아들 유장, 제효왕의 손자 유택 등과 모의하여 무제의 조서를 위조하고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3]연나라소공, 소왕, 양왕과 같이 되고자 신하들에게 자문했으나, 대부분 사절했다. 낭중 성진은 소제처럼 현 황제 소제도 무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자고 제안했다. 유단은 유택과 함께 가짜 황제 소제와 그를 옹립한 대신들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을 동요하게 했다. 유택은 임치에서 호응할 준비를 하고, 유단은 군사를 훈련하며 반란을 준비했으나, 반대하는 낭중 한의 등 15명을 죽였다.[3]

치천정왕의 아들 유성이 유택의 음모를 청주자사 준불의에게 고발하여 유택이 잡혔다. 연왕도 연루되었으나 처벌은 면하고 유택 등은 처형되었으며, 유성은 봉읍을 더 받았다.[3] 시원 원년(기원전 86년) 8월, 유택이 준불의를 죽이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연날왕과의 연관성은 숨겨졌다.[4]

소제가 어리다는 점을 이용하여, 곽광과 정권 다툼을 벌이던 상관걸, 상관안 부자, 악읍장공주, 상홍양 등과 결탁하여 곽광을 제거하고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4] 상관걸 등을 통해 곽광의 실정을 소제에게 상소했으나, 소제가 거짓임을 간파하여 실패했다.[3]

상관걸 일당은 곽광을 죽이고 소제를 폐위하고 유단을 황제로 삼기로 하고 유단에게 전했다. 유단은 상관걸을 왕으로 삼기로 허락하고 호걸들을 모아 준비했다. 그러나 연나라에 변괴가 일어나 유단은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3]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9월, 악읍장공주,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등은 반란 모의로 처형되었다.[3][4] 유단은 사면령을 읽고 자신은 해당되지 않음을 알고 자결하려 했으나, 좌우에서 봉국만 깎일 것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황제는 새서를 내려 유단을 꾸짖었고, 유단은 목을 매 자결했다. 왕후와 부인 등 20여 명도 따라 자결했다. 소제는 태자 건을 사면해 서인으로 삼고 유단의 시호를 ''로 정해주었다. 연나라는 폐지되었다.[3]

2. 1. 좌절된 황태자의 꿈

원수 6년(기원전 117년), 형제인 제회왕 유굉, 광릉여왕 유서와 함께 왕에 봉해져 연나라를 받았다.[2][3]

여태자 유거제회왕 유굉이 모두 죽자, 유단은 자신이 마땅히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숙위를 맡기를 청했다. 그러나 무제는 이에 분노하여 유단을 감금했고, 유단이 망명자를 숨겨준 죄까지 더해져 양향(良鄕)·안차(安次)·문안(文安) 세 현의 봉토를 삭감당했다.[3] 이 일로 무제의 눈 밖에 나면서, 막냇동생인 소제가 황태자가 되었다.[3]

2. 2. 1차 찬탈 시도

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하여 제후왕들에게 새서를 반포하자, 유단은 변고가 의심스럽다 하여 총신 수서장(壽西長)·손종지(孫縱之)·왕유(王孺) 등을 서울 장안으로 보냈다. 이들은 집금오 곽광에게 물어 새 황제가 즉위했음을 확인하고 돌아와 보고했다. 그러자 유단은 여전히 괴이쩍은 상황이라고 말하며 중대부를 서울로 보내 무제의 공덕을 칭송하며 군국에 사당[廟]을 세우자고 상소했다.[3]

대장군 곽광은 연왕을 회유하고자 3000만위안을 내리고 1만 3천 호를 증봉했으나, 유단은 황제가 되지 못함에 분노했다. 마침내 중산애왕의 아들 유장(劉長)과 제효왕의 손자 유택(劉澤) 등과 모의하고, 무제의 조서를 받았다고 속여 관료들의 직무를 맡아 무기를 갖추었다.[3]

군신들에게 옛 연나라소공·소왕·양왕과 같이 될 수 있도록 나라를 통치할 방법을 묻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사절했으나 낭중 성진(成軫)은 예전 여씨를 타도하고 문제를 옹립했을 때 대신들이 소제(少帝)와 그 형제 제후왕들을 혜제의 소생이 아니라 한 것처럼 지금의 황제 소제(昭帝)도 무제의 소생이 아니라 주장하자고 했다. 유단은 곧 유택과 함께 모의해 무제의 아들이 아닌 가짜 황제 소제와 그를 옹립한 대신들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군국에 글을 뿌려 백성들을 동요하게 했다. 유택은 임치로 돌아가 연왕과 호응할 준비를 했고, 유단은 무기를 갖추고 사람을 모으고 대대적으로 사냥을 실시해 군사를 훈련하며 때를 기다렸다. 낭중 한의(韓義) 등이 반대하자 한의 등 15명을 죽였다.[3]

그러나 치천정왕의 아들 병경후 유성이 유택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청주자사 준불의에게 고했다. 준불의는 유택을 잡아들였고, 소제는 대홍려승(大鴻臚丞)을 보내 조사하니, 연왕도 연루됐음이 드러났다. 다만 연왕은 처벌을 면했고, 유택 등은 복주됐으며, 유성은 봉읍을 더 받았다.[3] 한서 소제기에서는 소제가 즉위하고 개원한 시원 원년(기원전 86년) 8월에 “유택이 모반해 준불의를 죽이려 했다 발각돼 복주했다”라고만 서술해 연날왕과의 연관성을 숨겼다.[4]

2. 3. 2차 찬탈 시도

소제가 어리다는 점을 이용하여, 곽광과 정권 다툼을 벌이던 상관걸, 상관안 부자, 악읍장공주, 상홍양 등과 결탁하여 곽광을 제거하고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4] 상관걸 등을 통해 곽광의 실정을 소제에게 상소했으나, 소제가 거짓임을 간파하여 실패했다.[3]

상관걸 일당은 곽광을 죽이고 소제를 폐위하고 유단을 황제로 삼기로 하고 유단에게 전했다. 유단은 상관걸을 왕으로 삼기로 허락하고 호걸들을 모아 준비했다. 그러나 연나라에 변괴가 일어나 유단은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3] 그러다가 악읍장공주의 사인의 아버지 연창이 이 모의를 상소해,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9월, 악읍장공주,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등은 반란 모의로 처형되었다.[3][4] 유단은 사면령을 읽고 자신은 해당되지 않음을 알고 자결하려 했으나, 좌우에서 봉국만 깎일 것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황제는 새서를 내려 유단을 꾸짖었고, 유단은 목을 매 자결했다. 왕후와 부인 등 20여 명도 따라 자결했다. 소제는 태자 건을 사면해 서인으로 삼고 유단의 시호를 ''로 정해주었다. 연나라는 폐지되었다.[3]

3. 가계

광양경왕 유건의 아들이며, 안정여후 유현과 신창절후 유경은 유단의 형제들이다.[6] 안정여후는 본시 원년(기원전 73년) 7월 임자일에 거록군 땅으로, 신창절후는 4년(기원전 69년) 5월 계축일에 탁군 땅으로 봉해졌다.[6]

참조

[1] 서적 한서 무오자전
[2] 서적 한서 권6 무제기제6
[3] 서적 한서 권63 무오자전제33
[4] 서적 한서 권7 소제기제7
[5] 서적 한서 권8 선제기제8
[6] 서적 한서 권15 하 왕자후표 하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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